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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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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268 작성일 2002-08-08 05:2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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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새로운 삶의 동반자 국민연금(수기 당선작)
작성자 국민연금
내용
제6회 최우수상
새로운 삶의 동반자 국민연금

김 경 숙/광주 광역시 남구 월산5동


한없이 높고 푸른 하늘, 알록달록 고운색으로 물들어가는 가로수들 사이로 출근시간에 바쁜 차량들이 신호대기를 위해 길게 늘어서 있습니다. 차 안의 라디오에서는 늦가을에 딱 어울리는 분위기 있는 음악이 흐르고 있습니다. 생각 없이 차창 밖을 바라보던 내 시선이 문득 한곳에 머물렀습니다. 지난 여름보다는 푸르름이 퇴색된 길가 화단 한 귀퉁이에 수줍게 잔디 틈에 섞여있는 민들레를 발견했습니다. 아….. 시어머님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먼 곳으로 떠나버린 남편의 얼굴도 떠오릅니다. 그리고 이내 가슴이 저며옵니다.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대학의 캠퍼스 커플로 만나 부부의 연을 맺고 예쁜 두 딸을 낳았습니다. 차분하고 성실한 남편은 직장에서는 신임을 듬뿍 받고 가정에서는 한없이 자상하고 건실한 가장이자 만점 아빠였습니다. 뭐하나 부러울 것이 없이 행복하기만 했습니다.

금융업에 종사하던 남편은 서울의 본사에서 입사이래 9년 정도 근무를 하던 중 고향인 광주 지점으로 발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살고있던 집에 이사할 수 없는 사정이 있어 불가피하게 우리가족은 서울과 광주로 떨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회사에 행사가 있는 몇 번을 제외하고는 한 주도 거르지 않고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차를 몰고 서울로 달려와 두 아이들을 덥석 안아주던 자상한 남편……


가정에선 자상한 아빠, 직장에서 성실했던 남편
이 시간들이 나와 내 아이들에게 남편과의 영원한 이별을 준비하는 예행연습의 날들이었음을 그 누구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일년 반이라는 시간들이 지나고 다시 본사로 발령이 나리란 기대와는 다르게 지방의 신설 지점장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점포를 책임져야 할 남편의 업무증가와 함께 가족이 오래 떨어져 사는 것도 좋지않다는 생각에 서둘러 지방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떨어져 살았던 그 동안의 안타까운 시간들을 보상이라도 받듯 함께 살게 되니 우리들은 너무 행복했습니다. 남편은 최연소지점장 발령이라는 회사의 기대에 부응하고 또한 타고난 성실성으로 최선을 다한 결과 전국 최우수 점포장상을 수상하고 승진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남편은 소화가 잘 되지 않는다며 약국에서 소화제를 사먹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이려니 하고 무심코 지나쳐버렸습니다. 하지만 계속 체중이 줄고 소화가 되지 않는 증상이 계속되자 서둘러 병원을 찾았고 위내시경 검사 중에 종양이 발견되었습니다. 위암말기. 이미 임파선에 전이되어 수술이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래도 아직 간에는 전이가 되지않아 항암치료라는 한 가닥 희망을 가져보자는 의사의 말이 귓가에 윙윙 맴돌뿐……

꿈에서조차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일이 내 앞에 닥쳐왔습니다. 믿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쳐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소중한 내 남편을 이대로는 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며 정신이 바짝 들고 십 여년동안 우리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남편을 위해 이제는 나의 모든 힘을 다해야겠다는 각오를 하였습니다.

병원치료 외에 민간요법을 병행하기로 한 우리 가족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시작되었습니다.
황토찜질이 좋다는 말을 듣고 온 들을 헤매시어 황토를 구해오시던 시아버님, 위에 좋다는 다슬기를 잡기 위해 차디찬 강물도 마다 않으시던 친정어머님, 몸이 약하셔서 당신 몸도 제대로 가누기 힘든 시어머니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계속되었던 새벽기도. 이루다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모든 방법과 정성을 다한 덕분인지 발병 후 두 달 뒤 CT 재촬영 결과는 수술이 가능할 정도로 암세포가 약해졌다는 낭보였습니다. 곧바로 위 전부를 절제하는 대수술을 받았고 힘든 수술을 남편은 잘 견뎌냈으며 수술 경과도 좋았습니다. 항암치료로 다 빠졌던 머리카락도 새로이 돋아나고 남편은 복직을 꿈꾸며 새로운 삶에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늘의 뜻은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수술 후 5개월이 지날 무렵 남편의 몸 상태가 심상치 않게 변했습니다. 황달 기운이 얼굴에 그리고 차츰 온몸에 나타나서 병원에 달려갔습니다. 진찰 결과는 우리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췌장부분에 암세포가 재발되었다는 것입니다. 발병이후 암과 싸워 이겨내겠노라며 그렇게도 열심히 노력했던 남편이 처음으로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위암으로 아빠를 잃은 두딸과 나
남편의 상태가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어갈수록 나와 가족들은 애타게 간호에 매달렸습니다. 겨울의 찬 기운이 채 가시지도 않은 아파트 뒷산을 헤메어 쑥과 약초를 뜯어다 녹즙을 만들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우리집으로 오던 중에 정차해 있던 버스 속에서 발견한 길가 담벼락의 민들레를 캐기 위해 무작정 내리셔서 준비된 도구도 없이 손으로 뿌리까지 캐시곤 겉옷에 싸 들고 오셨던 시어머니, 오직 남편을 살려내겠다는 마음하나로 모든 가족들이 매달려 온갖 정성을 다하셨음에도 남편은 연달은 투병생활을 끝으로 98년5월 홀연히 바람처럼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

차가운 땅속에 남편을 묻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그 산을 떠나온 뒤 아무 생각 없이 죽은 듯이 지내오던 어느 날 두 아이가 아빠를 멀리 보내고 처음 맞이하는 어버이날에 학교에서 써온 편지와 카네이션을 보고 참았던 눈물을 쏟아 내고야 말았습니다. "엄마 힘내세요. 저희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안 계신다고 해서 기죽지 않을 거예요. 저희도 절대 울지 않을테니 엄마도 이젠 슬퍼하지 마세요. 엄마 사랑해요!!" 그래.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는 남편은 떠나갔지만 내 곁에는 착하고 예쁜 딸들이 함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남편의 그늘에서 편하고 안일하게만 살아왔던 내가 정작 가장이 되어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혼자서도 살수 있도록 준비하지 않은 상황에서 나에게 미래는 불안과 두려움 그 자체였습니다. 아직 초등학생 인 두 아이들, 혹독한 IMF여파로 사회분위기 역시 어둡기만 했고 장말 앞이 깜깜하고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유족연금은 아빠가 하늘에서 보내주시는 장학금
그러던 중 남편의 직장 총무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남편이 88년 국민연금 개시 할 때부터 계속 납입을 하고 있었으니 보장을 받을 수 있을 거라며 가까운 연금공단에 문의를 해보라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때서야 급여명세표에 매달 연금공제액이 적혀있었던 것이 생각이 났습니다. 봉급에서 매달 공제해갈뿐 우리가 언제 혜택을 볼일이 있겠냐고 짜증을 부렸던 기억과 함께…… 반가움도 잠시 선뜻 전화하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아니 두려웠습니다. 또 한번 남편의 죽음을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도 싫었습니다.

일주일 뒤쯤 용기를 내어 연금공단에 문의를 하였더니 뜻밖에도 직원께서는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셨구요. '유족연금'을 받을 수 있으니 서류들을 준비해서 제출하면 매월 일정금액이 통장으로 지급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하늘에서도 남편이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는 생각에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다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딸아이들에게도 통장을 보여주며 조금씩 미리미리 준비해 둔 것이 어렵고 힘들 때 큰 힘이 된다는 사실과 국민연금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빠가 보내주시는 이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좋은 방법일까 논의 끝에 아이들의 교육비로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아빠가 매달 하늘에서 보내주시는 '장학금'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아이들은 남다른 다짐을 했습니다.

사십이 다된 나이에 번듯한 일자리를 찾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자격증 취득 공부며 여기저기 일자리를 알아보던 중에 남편이 직장생활과 함께 틈틈이 사회를 위해 봉사하겠다며 대학동기들과 함께 창립하여 활동하던 사회단체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사회단체의 형편상 큰 재정적인 도움을 줄 수는 없지만 남편이 못다 이룬 일들을 내가 대신해서 같이 이루어가지는 말씀이었습니다.

날로 심각 해져가는 청소년 문제를 함께 생각하고 해결점을 찾아내어 우리들의 미래를 밝아지게 하자는 목표로 열심히 애쓰는 터이고 남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에 경제적인 면은 크게 고려 하지 않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때부터 이 순간까지 새로운 영역을 공부하며 남편 몫까지 해내려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생을 밝혀준 국민연금
남편과의 이별은 나의 삶에 많은 변화를 가져 다 주었습니다. 나와 내 가족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서만 살아온 나에게 세상을 다시 볼 수 있는 안목을 키워주었습니다. 삶의 목표를 재정립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 다 주었습니다. '불행'이라는 단어는 나와는 상관없다며 주위의 '불행'에 진실된 눈길 한번 보내지 않았던 오만했던 나를 반성으로 이끌어주었습니다. 가슴 한켠에 슬픔을 묻고, 하지만 용기를 내어 열심히 세상을 살아내는 또 다른 내 모습과 닮은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힘들이 모여 남을 위해 사회를 위해 봉사하며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고귀한 일인지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않지만 작은 것에서 기쁨과 보람을 느끼는 지혜도 배웠습니다.

힘들고 막막했을 때 희망의 등불이 되어 내 생을 밝혀준 국민연금! 우리사회의 구성 운들을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사회복지제도 인 국민연금이 한때는 나에게 아무 의미도 없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내 삶의 일부분이 되어 나와 우리 가정을 지탱해주는 큰 의미가 되고 있음에 새삼 고마울 뿐입니다. 이제 어엿한 중학생이 된 사랑하는 아이들도 국민연금을 통해서 매달 전해지는 아빠의 애틋한 사랑을 느끼는 듯 뛰어난 성적으로 매사에 자신감 있고 성실한 자세로 학교생활을 해가고 있습니다.

이렇듯 뜻하지 않은 일들로 힘들어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유족연금, 장애연금, 노령연금 등으로 사랑의 큰 힘을 발휘하는 국민연금이 더욱 더 연구되고 발전되어 온 국민의 든든한 동반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아울러 국민연금공단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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