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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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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417 작성일 2002-08-22 08:5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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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장애 극복의 밑받침이 되어준 장애연금
작성자 국민연금
내용
제6회 우수상
장애 극복의 밑받침이 되어준 장애연금

김 대 석/충북 청원군 북이면


국립대학 근무 시 공무원 연금제도의 혜택을 받고 있던 나는 1988년 2월 현 직장으로 자리를 옮기자 국민연금 의무 가입자가 되었다. 그리고 첫 월급을 받는 날, 월급 명세서 지출란에 국민연금이라는 항목을 보며 "60세까지 살지 죽을지 어떻게 알아 보험은 사고나 나야 혜택 보는 것 아냐"라고 하자 동료들도 "그래 보험회사에 생명보험 가입하는게 더 낫겠다 60세 이후에 1년을 살지 10년을 살지 알 수가 있나 "하며 한마디씩 하였다.

이때만 해도 선진국형 사회보장 보험이니 공적연금제도니 하는 말조차 생소하여 국민연금 제도를 시행하는 취지 및 기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고, 장기간의 연금 납부기간에 비해 혜택을 볼 수 있는 시점이 너무 멀어 "내가 낸 것 만큼 받을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던 때였다.

그런데 마음속에 간직한 꿈을 이루며 건강하게 살아갈 것이라고 자신만만 했던 나에게도 예고치 않은 불행이 닥치고 말았다. 시설공사 감독관으로 근무 시 22,900V의 고압전류가 흐르는 변전실 점검 시 감전사고를 당하여 서울로 후송되었으나 치료가 불가능 하여 양팔 일부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고 한 순간에 근로 능력이 없는 지체장애 1급 중증장애인이 되어 버렸다.


예고없이 닥친 불행
그리고 몇 달간의 투병생활을 마치고 집에서 요양하고 있을 때 회사에서는 나에 대하여 권고 사직이냐 복직이냐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였다. 나는 복직에 대한 불안과 초조함이 엄습해와 신체적인 고통과 심적인 마음도 추스리지 못한 체 회사에 출근은 하였으나 말하고 걷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 같은 장애인을 복직 시켜 줄까?'하는 생각을 하니 하루하루가 길기만 하였다. 그러나 경영진은 회사를 위하여 열심히 일을 하다 다친 직원에게 재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모든 직원들이 누구를 믿고 열심히 일을 하겠냐며 복직이 허락되었다. 힘들게 직장에 복직은 하였지만 일을 해야 될 양손이 없었기에 하는 일없이 사무실만 지키며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중 서무과 직원이 건네준 월급봉투 지출란에 국민연금이란 항목을 보며 장애연금이 생각이 났다.

나는 직장에 대한 복직 문제로 정신이 없던 터라 국민연금관리공단에 장애연금 신청하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국민연금관리공단에 문의를 한 후 장애연금 신청에 필요한 서류를 작성하여 영등포지점에 제출은 하였으나 국민연금에 가입한지 10여 개월 밖에 안되었고 보험료 불입액이 월 8,500원 정도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몇일 후 집으로 배달된 우편물 속에는 장애연금 수급증과 장애 발생일로부터 신청일까지 소급한 일시금과 매월 70,000원 정도의 연금이 분기별로 지급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첫 지급된 장애연금을 받을 때만 해도 알차게 써야 되겠다는 생각을 마음속에 다짐을 하였지만 한순간의 사고로 인하여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빼앗겨 버린 현실을 원망하며 장애인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 방황이 시작되면서 장애연금이 통장으로 들어 오기가 무섭게 하룻밤 술값으로 탕진하고 말았다.

그러기를 일년.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돌아봤을 때는 나를 도와주려고 했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손가락질 하며 내 곁에서 멀어져 있었다. 회사에서 배려해준 단 한번의 재활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절박감에 가정과 직장에서 어떻게 해야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장애연금으로 재활기회 만들어
나는 지나온 생활을 돌이켜 보며 내가 왜 방황을 하게 되었는지 마음속 깊이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장애인이 되기 전 마음속 깊이 자리잡았던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버리지 못해 깊은 방황의 수렁으로 빠져든 것을 깨닫고 장애인이 된 현실을 직시하며 새로운 꿈과 희 망을 가져야 겠다는 생각을 하였다.그러나 현실은 나에게 혹독한 인내력을 요구하였다.

일반직이면서도 장애로 인해 글씨를 쓸 수 없었기에 사무행정에 대한 미련을 접고 공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보았으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생산현장에서 기계 스위치를 조작하는 일 뿐 이었다. 나는 상사에게 생산 현장에서 일을 하게 해달라고 간청을 하였지만 장애인이 기계를 조작하는 것은 위험하다 하시며 단순한 업무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에 굴하지 않고 여러 번 간청 한 끝에 생산 반장으로 일을 하라는 허락을 받았다. 생산 현장에서 근무를 한지 1년 정도가 지나면서 기계에 대한 문제점 및 개선안에 대하여 보고를 하려고 하였으나 직장에 사무기기라곤 타이프가 전부였고 동료들과 아내에게 대필시키는 것도 한계가 있어 문서 작성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기초적인 정보화 기기를 활용하여 문서작성을 하려고 워드프로세서를 구입하려 하였으니 제품가격이 만만치 않았고 사용법에 대하여는 문외한 이었으며 또한 수중에는 그 만한 여력이 없었다. 그런데 생산 현장에 근무하면서 부터 모아 두었던 장애연금이 차곡차곡 통장에 쌓여 있었다. 그 중 일부를 찾아 학원에 등록하여 워드프로세서 기능을 배우기 위해 양쪽 의수 사이에 볼펜을 하나씩 끼우고 자판을 치며 3개월을 배우자 간단한 문서작성 및 설계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장애를 극복에 밑받침이 되어준 국민연금
그래서 통장 속에 남아 있는 잔여 장애연금과 아내의 쌈지 돈을 보태 휴대용 워드프로세서를 구입하여 집과 직장으로 가지고 다니며 그 동안 생각에만 머물렀던 기계설비에 대한 개선안을 밤을 새워가며 문서로 작성하여 제안하기 시작하였다.

제출한 제안이 하나 둘씩 채택 되어 실행에 옮겨지면서 생산량 증대 및 예산이 절감되는 성과로 나타나자 장애인이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 했던 동료 직원들과 상사들도 나를 보는 시각이 달라지기 시작 하였으며 동료들의 축하 속에 승진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컴퓨터가 사무실에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나는 정보화 기기 활용에 대해 남보다 앞서기 위해 분기별로 지급 되는 장애연금으로 컴퓨터 학원에 등록하여 초급, 증급, 고급반을 각각 3개월식 배운 후 근로능력을 회복할 수 있었으며 풍요로운 결실의 계절인 가을이 서너 번 흐른 후 장애연금의 도움으로 컴퓨터를 구입하여 집에서 각종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되자 모든 생활이 한결 수월해졌다.

나는 그 동안 많은 것을 체험하며 보고 느꼈지만 이렇게 서기까지는 정보화 기기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정보화 기기들을 활용할 수 있게 배움을 주고 그 기기들을 옆에 둘 수 있도록 만들어준 장애연금이 밑받침이 되어주지 않았으면 나의 장애극복은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리고 국민연금관리공단의 주요 업무인 국민연금제도의 기능과 역할에 대하여 새롭게 인식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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